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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가는 언제 들고 시집은 또 언제가요?

 

오늘 막내가 모는 차로 어머니와 함께 고흥에 들렀다가 어느 지점에서 어머니께 물었던 말이다.

- 음~ 신랑이 먼저 처가댁에 장가를 오지 / 그러고는 그다음 날이나 이삼일 더 묵었다가 신부를 데리고 부모님이 사는 자기 집으로 가는데 그것이 시집가는 거야! -

 

며칠 전 일인데 돌아가신 외할머니와 두 이모가 꿈에 나와서 왜 벌초하러 안 오냐고 어머니께 따지더란다.

그랬기에 놀라서 당장에 시골에 내려가려고 했었는데 너무나도 날이 덥기에 자꾸만 미뤘다가 그때로부터 사흘이나 지난 오늘에서야 출발하기로 막내와 약조했다나.

 

오늘(어제) 새벽에 당연히 나는 따라가지 않을 거로 알고서 헛걸음 삼아서 물었단다.

- 중근아! 우리 시골 내려가려는데 너도 같이 갈래? -

- 형님! 아버지 산소랑 이모부 이모님 산소에 다녀오려고요! -

 

그것 '산소'라는 말에 나는 0.1초의 망설임도 없이 곧바로 가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언제 출발할 거냐고 물으니까 한 시간쯤 뒤에 가면 어떻겠냐고 되묻더라!

 

우연의 일치치곤 너무나도 신통하다.

밤새 '열대야' 탓에 제대로 잠 못 이뤘다.

도저히 안 되겠으면 욕실에 들어가 물을 끼얹고 샤워로 식혀보기도 두세 번 / 어느 순간엔 잘 보이지도 않은 그 조명 아래서 거품 잔뜩 얼굴에 싸 바르고 일회용 면도기로 깔끔하게 밀었다.

 

시골에 갈 거니까 다시금 샤워하면서 그런 느낌이 나더군!

- 아하! 오늘 시골 어르신(선친을 비롯한 고조 대 할아버님까지 먼저 가신 여러 영령) 뵐 일이 생기니까 면도 먼저 했던 거였네!!! -

 

고흥에 내려가서 가장 먼저 여러 어르신이 한데 모셔진 우리 문중의 '가족 묘원'을 찾았다.

그랬는데 사각으로 빙 두른 그 자리 너무나도 어지럽다.

 

온갖 잡초와 잡목이 우거져 어기가 산인지 어디가 묘지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로 꽉 막혔더라.

거기까지 가는 길 경사가 커서 겨우겨우 어머님 모시고 들렀는데 그 자리가 어디쯤인지 분간도 어렵더라.

 

그랬어도 동생과 나는 이전에 이미 몇 번 들렀었기에 그 숲을 헤치고 계속하여 들어가서 드디어 묘원 맨 아래쪽 양 끝에 설치했던 묘지 지키는 석상 둘 중 하나를 발견해 냈다.

그랬기에 조금 더 들어가서 돌로 만든 커다란 제단도 찾아냈다.

 

그 자리에 가져간 짐(낫 두 가락, 톱 세 가락, 낡은 명주 장갑 한 뭉텅이, 각종 떡과 과일 봉지, 술과 술안주를 비롯하여 제단을 차리는데 필요한 여러 잡기)을 내려놓고서 동생은 톱으로 나와 어머니는 낫으로 비석과 그 주변 그리고 사각으로 틀을 잡은 묘원 전체를 다듬기 시작했다.

맨몸으로도 힘든데 거기까지 여러 제물 들고 오르려니까 그 숨 가쁨은 또 오죽했으랴!

 

그런 상황에서 지체하지 않고 곧바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톱질에 낫질-

억수처럼 흐르는 땀! 비 오듯이 펑펑 쏟아지고 온몸에 젖어 드는 땀!!!

 

그 상황에서 아! 어찌나 힘들던지 이러다가 정말 죽을 것만 같았다.

아마도 그 작업을 시작한 지 한 시간쯤 흘렀으리라!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서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다.

바닥은 자갈이 깔렸고 덩그러니 비석들만 있는데 설마하니 그렇게까지 가득 찼으랴!

 

그런 심경에 출발했으니까 그런 자리에 물 같은 걸 생각이나 했을 거나?

목도 타고 속도 타고 몸도 타고-

 

얼추 가족 묘원 쌍이 돌아왔기에 인제 그만하자고 했다.

겉으로 쉬지 말고 기왕에 쉴 거 가쁜 숨이 끝날 때까지 진짜로 쉬자고 했다.

 

힘들어서 가쁜 숨 몰아쉬면서도 우리 어머니와 동생은 나처럼 그렇게 한가할 마음이 없었나 보다!

얼른 끝내고 목 좀 축이잖다.

 

그랬기에 제단을 못 쓰는 장갑으로 쓱싹쓱싹 문지르고서 그 자리에 제수를 곱게 올리고서 장애가 심해 절을 못 하는 동생은 그대로 둔 채 내가 연거푸 큰절 올려서 제식을 마친다.

그러고는 상에 올렸던 사과 중 아무거나 들고서 베어 물고서 아작아작 씹는다.

 

어머니도 동생도-

그쯤에서 간간이 바람이 불어오더니 이내 빗방울이 와 닿기도 하더라!

 

비라고 해봐야 가뭄에 콩 나듯이 병아리 눈물만큼이나 겨우!!!

- 어휴! 성질나! 그까짓 것 오려고 그토록 후텁지근 쪄댔던 거냐!!! -

 

빈 술병 하나도 종이컵 하나도 비닐봉지 하나도 과거에 누군가가 버렸을 그 어떤 거라도 모조리 싸매고서 가족 묘원의 그 산길을 다시 엉거주춤 아슬아슬 내려왔다.

그 몸으로는 도저히 이모부와 이모님이 누워계시는 그 자리를 찾을 힘이 없었다.

 

바로 아래 동네에 큰댁과 작은 집이 있기에 들리면 좋겠지만, 당장에 가진 것이 너무나도 없기에 빈손으로 들어갈 순 없었다.

그래서 큰댁 / 작은 집 패스!!!

 

그리하여 예전에는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 외삼촌이 나란히 있고 거기서 5분 거리에 이모님과 이모부가 모셔진 장지가 있는데 앞에서 거론한 세분을 얼마 전에 묘를 파 화장한 뒤 바람 따라 보냈기에 나머지 두 분이 모셔진 데로 갈 일이었지만, 그것도 너무나도 급했기에 패스하고서 그쪽 지역에서 가장 번화한 지역으로 무조건 달려갔다.

처음엔 물이 급했기에 어느 마트에서 물을 샀는데 가만히 생각하니 물 하나로 끝낼 일이 아녔다.

 

그리하여 그 지역 주민에게 물어서 국숫집을 찾았다.

그랬더니 그 길을 쭉 가면 학교가 나오는데 학교 근처에 국숫집이 있다고 알려주더라.

 

우리 어머니 그 소리 듣더니 자신이 학교 자리를 안 다며 안내할 테니 얼른 가자고 차에 오른다.

그 학교 개관식인가 뭔가를 했을 때 어머니가 그 자리에 계셨다나 뭐라나-

 

우리 어머니 그 지역에서 초등학교를 아주 잠깐 다니다가 말았다.

1945년에서 1950년도 중 어느 시점에-

 

남녀 차별을 두지 않았던 외할아버님께서 그 이른 시기에 빨강 가방에 신식 옷까지 입혀서 말이다.

그런 엄청난 뒷받침에도 그 당시로는 학업에 전혀 취미가 없었던 우리 어머니 도중에 하차하셨다.

 

그 길을 따라 올라가 보니 웬걸 눈에 보이는 학교를 닮은 건물이 두 개가 나온다.

우리 어머니 저건 옛날에 없었고 이게 있었지!^!

 

그런데 어머니 기대(?)를 저버리고 거기를 지나 더 들어가니까 드디어 커다란 간판 [콩물국수]가 보이더라.

들어가서 주문하고서 아마도 십 분 남짓은 걸렸을 거다.

어찌나 늦던지 내 배꼽시계로는 한 시간도 더 걸렸을걸-

 

그 국수 너무나도 맛나더라! 나는 보통 열 시 넘어서 아침을 뜨는데 오늘은 그럴 참도 없이 죽자 살자 내려와서 더 죽자 살자 낫질하고 더 죽자 살자 더위와 싸웠으니 그 맛이 오죽했을까???

나 뿐만이 아니라 우리 어머니도 연신 그 맛을 자랑하신다.

 

- 콩은 삶아서 이렇게 저렇게 껍질을 벗겨내고 그 알 콩만을 갈아서 국물을 낸다나 뭐라나! -

 

그렇게 배를 채우고 또 찌는 듯한 더위 잠시 피했더니 다시금 몸이 충전됐다.

그 자리를 돌아 나와서 인제는 이모부와 이모님이 계신 데로 가야 했었지.

 

그렇게 두 분을 찾아 비탈길 오르는 동안 예전에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그리고 외삼촌이 누워 계셨던 자리 살짝 곁눈으로 봤는데 그 자리에 자란 잡초 키가 내 키보다 더한 것도 같다.

그것을 잡초라기보다는 본래부터 대나무 숲이 있었는데 그 대나무 뿌리가 어찌나 드세던지 도저히 어떻게 해볼 수가 없었기에 결국은 화장해서 날렸다는 거였거든.

그런 의미에서 다시 생각해보니 잡초로 보였던 그 커다란 풀들이 대나무였을 것도 같다.

 

이모부와 이모님 산소를 찾아 오르는데 찾길 주변의 밭들이 온통 잡초로 무성하다.

지난번에 왔을 때만 해도 온갖 곡식이며 채소가 자랐던 곳인데-

 

진짜 촌에는 농사지을 분이 다 사라지고 안 계시나 보다-

 

이모부와 이모님도 어느 널찍한 밭 가운데 나란히 합장한 산소를 뒀는데 그 자리고 우려가 현실이 됐다.

그 자리도 밭을 경작하지 않았기에 온갖 잡초가 무성하다.

 

그 초입을 밭고랑을 거쳐서 들어가야 했는데 거기서부터 어디가 어딘지 모르겠기에 턱턱 막히더라.

밭을 둘러싼 외곽으로는 본래 밭으로 물이 괴지 않게끔 고랑이 파였던 자린데 그 부근에선 보이지 않는 풀이 푹푹 빠지니까 정말 더 죽겠더라.

 

동생이 길을 낸답시고 앞장서서 움푹움푹 빠지는 그 자리를 더듬더듬 어머니도 어떻게 더 들어갈 수 있게끔 정리해준다.

 

나는 낫을 들고 팍 고꾸라졌지만, 얼른 낮을 지팡이 삼아 완전히 넘어지진 않았다.

또 그 모양새 들키지 않으려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연기도 했었다.

 

그 연기 덕인지 우리들의 간절함 탓인지 거기 고랑 자리 지나서 정작 밭 가운데로 들어가니까 풀은 무성해서 가슴을 얼굴을 덮었어도 그 풀들 일년생 풀이라서 날카롭지 않고 고분고분 잘 넘어지고 부러진다.

그렇게 한참을 들어갔더니 드디어 두 분을 모신 비석이 나온다.

 

그 비석 자리 바닥을 쓱싹 닦고는 그 자리에도 가져간 제물을 쏟았다.

 

그런 뒤에 또다시 산소 주변 정리에 들어갔지.

거기 잡초들 너무나도 울창하고 커서 가슴에 닿고 얼굴에 닿지만, 우리 문중의 그 가족 묘원에서 겪었던 고초에 비하면 새 발의 피다.

 

그 모두가 일년생 풀이고 잘 베어졌으니까-

거기서도 꾸벅꾸벅 절하고서 드디어 차가 광주를 향해 출발했다.

 

이번엔 아무것도 없이 그냥 몸만 내려갔으니 어렸을 때 살던 고향 땅 지나더라도 문 꽉 닫고서 그냥 지나치자고 서로서로 다짐하면서-

그랬었는데 막상 동네 앞을 지나는데 저 앞에 얼굴 뻔한 그 옛날의 이웃들이 즐비하게 그늘진 평상에 앉아 바닷바람 즐기는 모습이 가득하다.

 

도저히 창문을 안 내릴 수가 없다.

 

- 아이고 형님 내려왔소! -

- 그래 벌초하려고 왔구먼그래! -

 

여기저기서 손 인사 말인사가 크다.

더는 어렵겠다. 모두 내려서 평상으로 다가갔더니 하나같이 빈자리 내주시고 만들어주신다.

 

- 그래 그동안에 어떻게 살았는가? -

- 그래 그 간에 별고는 없었고? -

 

친구 어머니는 그 친구랑 내가 연락이나 하는지도 묻는다.

어떤 분은 이럴 줄 알았으면 뭐라도 준비해둘 걸 지금은 아무것도 없다고 안타까워하신다.

 

- 어휴! 숙모^ 그럴 것 같아서 우리고 문도 안 내리고 그냥 가려고도 했는데 그런 소리 말아요! -

 

거긴 그 옛날 내가 살 때처럼 바닷바람이 엄청나게 시원하다.

그 자리서 모두 정겹게 인사하고는 자리를 물러 나와 광주로 향했다.

 

나는 밤새 잠을 안 잤기에 잠이 와서 죽겠더라.

내가 자버리면 동생도 졸릴 텐데 걱정이 태산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올라오다가 문득 막내 이모 생각이 떠올랐다.

우리 막내 이모 참으로 예뻤다.

 

조금 된 것도 같기에 나는 그때가 언제였을지 정확히 기억할 수가 없다.

아마도 1967년에서 1969년 사이쯤 됐을 거다.

 

그 시절에 나는 산중에 살았는데 그 산중에서 쫄랑쫄랑 어머니를 따라 신작로로 내려와서 옆 마을이 외가인 거기까지 어머니 치마폭을 따랐으리라!

그리고 우리 예쁜 이모가 시집가는 걸 봤었다.

요즘처럼 차량이 아닌 가마를 타고 외가가 있던 곳 좁다란 골목길을 따라 그 가마가 떠나는 걸 봤었다.

 

갑자기 그 생각이 들어서 어머니께 물었던 거다.

 

- 엄니! 장가는 언제 들고 시집은 또 언제가요? -

- 그건 왜 묻냐? 같은 날 가는 거 아냐? -

 

- 아니야^ 옛날에 막둥이 이모 시집갈 때 가마 타고 가는 걸 내가 봤기에 그래!!! -

 

- 흐흐! 그렇지^ 신랑이 먼저 처가로 장가를 오지! 그러고는 신부를 데리고 그다음 날 가기도 하고 어떨 때는 며칠을 묵었다가 가기도 해! 자기네 집으로! 그것이 시집간 거야!!! -

 

그렇게도 예뻤던 우리 막둥이 이모 어린 두 딸만 남겨 놓고서 멀리멀리 떠나가셨다.

1974년 고흥 남계리의 어느 자리서 작은 상점을 하고 계셨는데 한밤중에 어느 놈이 우리 이모 온몸을 난도질하여 결국은 그렇게 떠나셨다.

 

그 나쁜 놈 지금까지 잡아내지도 못한 채 무심한 세월만 흐르고 흘러 여기까지 와버렸는데….

아~ 이모님! 지금은 어디쯤 계시나요?

보고 싶네요!!!

강동 갯가의 둘째 언니 큰아들 중근이가 매우 매우 그립답니다.

 

 

 

하- 오늘(어제)은 어머니 한도 풀어드리고 / 오래간만에 땀도 흠뻑 내보고 / 최근에 한 번은 꼭 가보고 싶었던 고향 땅도 밟았고….

류중근이 땡잡은 날이었지요!!!